
예멘 후티 반군의 공세에 시달리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에 군사 개입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는 등 동맹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스라엘 매체 예루살렘포스트는 최근 분석 기사에서 사우디의 안보 공백이 이스라엘에 정보·방공 협력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안나 바르스키 예루살렘포스트 기자에 따르면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이달 초 하루에 두 차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해 후티 공습을 요청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거절하고 정보 지원과 표적 정보 제공에만 동의했다. 후티 반군은 이란의 지원을 받아 예멘 수도 사나 등 북부를 장악한 무장세력이다.
열흘 뒤 미국은 개입 직전까지 갔다. 표적이 선정되고 미군 항공기에 폭탄까지 탑재됐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마지막 순간 작전을 중단시켰다.
사우디는 독자적으로 예멘 공습을 재개했지만 사태를 해결하지 못했다. 영국은 사우디 공군의 방어 작전을 돕기 위해 공중급유기를 한시적으로 보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튀르키예와 셰바즈 샤리프 총리의 파키스탄은 사우디 지지를 표명했고, 튀르키예는 방위협정에 따라 기술적 군사 지원을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발표했다.
바르스키 기자는 사우디 곁에 서겠다는 우방은 많지만 직접 전쟁에 뛰어들겠다는 나라는 훨씬 적다고 지적했다.
빈살만 왕세자는 그동안 미국 한 나라에 안보를 전적으로 맡기지 않는 전략을 펴왔다. 사우디는 3년 반 전 중국의 중재로 오랜 앙숙인 이란과 관계 회복에 합의했다. 미국이 위기 때마다 도와준다는 보장이 없으니 위기 자체를 줄이겠다는 계산이었다.
동시에 중국·러시아·튀르키예·파키스탄과의 관계도 넓혔다. 사우디는 8월 7일 이슬람 성지 메카에서 튀르키예·파키스탄과 공동방위협정을 체결했다. 세 나라 중 한 곳이 무력 공격을 받으면 세 나라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이다.
미국은 여전히 핵심 안보 축으로 남았다. 사우디는 미국산 무기를 계속 사들이면서 여러 개의 ‘보험’을 추가로 들어둔 셈이다. 바르스키 기자는 이제 그 보험의 실제 가치를 따질 순간이 왔다고 분석했다. 미사일이 떨어질 때 각 동맹이 내주는 것이 무기와 정보인지, 방공망이나 병력인지, 아니면 지지 성명뿐인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란과의 화해는 후티를 멈추지 못했고, 메카 방위협정도 아직 튀르키예와 파키스탄을 전쟁으로 끌어들이지 못했다. 사우디에 당장 급한 것은 방공이다. 사우디는 후티의 미사일과 드론을 막을 요격미사일을 동맹국들에 요청하고 있다. 역내 전쟁이 길어지면서 미국의 요격미사일 재고마저 줄어든 상황이다. 정보·조기경보 역량과 에너지 시설 방호도 필요하다.
빈살만 왕세자에게 더 큰 문제는 경제적 타격이다. 후티의 공격은 그가 ‘새로운 사우디’의 토대로 삼아온 안보와 비즈니스를 동시에 위협하고 있다.
사우디는 지난 10년간 석유 의존 경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가 개조 계획 ‘비전 2030’을 추진해왔다. 미래도시 건설, 관광, 외국인 투자 유치, 항만·비즈니스 허브 조성이 핵심이다. 이 구상은 사우디가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투자처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바르스키 기자는 리야드 상공의 미사일과 바브엘만데브 해협의 전쟁이 이런 이미지에 치명적이라고 지적했다. 19일에는 리야드 킹칼리드 국제공항 연료 저장 시설에서 거대한 검은 연기가 치솟기도 했다.
원유 수송로도 위협받고 있다. 사우디는 수십 년간 약 1200㎞ 길이의 동서 송유관에 투자해왔다. 걸프 연안의 원유를 홍해 연안 얀부항으로 보내 유사시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하기 위한 시설이다.
호르무즈 해협 운항이 차질을 빚으면서 이 서쪽 경로의 비중은 커졌다. 6월 사우디 해상 원유 수출의 92%가 얀부 터미널을 거쳤고, 동서 송유관은 하루 400만~500만 배럴을 실어 나르는 핵심 동맥이 됐다. 그러나 11일 이라크 쪽에서 날아온 드론이 송유관 펌프장 3곳을 타격하면서 송유가 일시 중단됐다.
후티는 서쪽 수출로도 압박하고 있다. 후티는 7월 사우디 선박에 대한 해상 보이콧을 선언했다. 다국적 해상 태스크포스는 후티가 위협 단계를 넘어 사우디 관련 선박을 실제로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경고했다. 이에 사우디는 아시아행 원유 수출을 수에즈 운하 경로로 돌렸고,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지날 때보다 항로가 크게 길어졌다. 바브엘만데브 해협은 홍해 남단과 아덴만을 잇는 해상 교역의 길목이다.
바르스키 기자는 선주·보험사·무역회사는 배가 실제로 침몰하지 않아도 항로를 바꾼다고 설명했다.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보험료가 오르고 운항 기간이 늘어난다. 후티는 미사일을 발사대에 둔 채로도 투입한 전력보다 훨씬 큰 경제적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우디가 거의 완벽한 지리적 덫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동쪽 호르무즈 해협은 막혔고, 이를 우회하려던 송유관은 공격받았으며, 서쪽 홍해 항로는 후티의 위협을 받고 있다. 사우디는 전투기와 요격미사일을 더 살 수는 있어도 호르무즈와 바브엘만데브의 위치를 옮길 수는 없다고 그는 지적했다.
후티의 목표도 커지고 있다. 후티는 홍해 연안 항구도시 모카를 장악한 뒤 해안을 따라 진격하고 있다. 정부군 지역과 맞닿은 타이즈주는 병력과 물자가 오가는 요충지다.
동쪽의 마리브는 후티가 오랫동안 노려온 전략 목표다. 예멘의 주요 유전과 가스전이 몰려 있는 이곳은 후티에 맞서는 세력의 핵심 거점이다. 후티가 마리브를 차지하면 예멘 정부의 경제 기반이 무너지고 후티는 독자적 수입원을 확보하게 된다. 지금은 무기와 자금을 이란에 의존하지만, 해안·항구·에너지 자원과 수백만 주민을 통치하게 되면 행동의 자유가 훨씬 커진다는 분석이다.
바르스키 기자는 후티의 성과가 예멘 정부군의 약점과 사우디 등의 장기전 기피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비대칭 전쟁에서 후티는 리야드를 점령하거나 사우디 해·공군을 격파할 필요가 없다. 살아남아 상대를 지치게 만들기만 하면 되고, 전쟁이 길어질수록 후티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바르스키 기자는 이 상황이 이스라엘에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이스라엘은 수년간 이란이라는 공동의 위협이 양국 간 이견보다 더 심각하다고 사우디를 설득해왔다. 이제 이란과 그 대리세력인 후티가 이 주장을 현실에서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우디에 필요한 분야는 이스라엘의 강점과 맞물린다. △후티에 대한 정보 △후티와 싸운 작전 경험 △탐지·요격 체계 △정보와 장거리 타격을 연계한 경험 등이다.
그는 역내 동맹이 그동안 정상 회동·서명·대사 교환 같은 의전 차원에서 논의돼왔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위협 탐지, 제때 전달된 경보, 표적 추적, 요격미사일 발사처럼 훨씬 실무적인 방식으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교관들은 그다음에 나서도 된다고 그는 덧붙였다.
다만 바르스키 기자는 이스라엘이 자기 논리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이스라엘에서는 사우디와 안보 이해가 맞아떨어질 때마다 이를 수교로 가는 단계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빈살만 왕세자는 후티 대응에 이스라엘의 역량을 활용하면서도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훨씬 넓은 계산에 따라 관리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문제 △국내 여론 △아랍권 내 위상 △미국에서 얻어내려는 대가 등이다.
사우디는 최근 몇 달간 이스라엘과의 관계정상화에서 기회보다 위험을 더 많이 봤다. 2025년 8월 공개된 여론조사에서 사우디 응답자의 99%가 이스라엘과의 ‘정상적 관계와 평화’ 수립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사우디 지도부도 1967년 경계선을 기준으로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팔레스타인 국가 없이는 이스라엘과 수교하지 않겠다고 밝혀왔다.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계 개선으로 사우디가 수교라는 대가 없이도 미국에서 상당한 혜택을 얻을 수 있게 된 점도 변수다.
바르스키 기자는 후티의 미사일이 사우디의 안보 우선순위는 바꿀 수 있어도 정치적 계산까지 지우지는 못한다고 분석했다. 빈살만 왕세자는 미국을 매개로 이스라엘의 정보·경보·작전 협력을 받으면서도 이스라엘 대사관은 리야드 밖에 둘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두 가지는 치러야 할 대가가 다른 별개의 결정이라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경보체계·정보·방공·항행의 자유 분야에서 장기적 자산을 쌓을 수 있다. 바르스키 기자는 중동에서는 지도자들이 함께 사진을 찍기 훨씬 전부터 안보기관들이 먼저 접점을 찾아왔다고 짚었다.
이스라엘의 예멘 관련 이해관계는 사우디와의 관계보다 넓다. 후티는 그동안 이스라엘 최남단 홍해 항구인 에일라트항으로 향하는 항행을 방해해왔다. 에일라트항의 직접 상업 활동은 큰 타격을 입었고, 이스라엘의 예멘 공습 이후에도 주요 해운사들은 이 항로로 크게 복귀하지 않았다.
모카·타이즈·마리브는 에일라트에서 수천㎞ 떨어져 있지만 전략적 거리는 크게 좁혀졌다. 후티가 해안과 자원을 장악할수록 홍해 남쪽 관문을 장기간 위협하고 자체 수입에 더 기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바르스키 기자는 후티가 해안·항구·자원을 안정적으로 장악하면 이스라엘이 남쪽에서도 북쪽 레바논 헤즈볼라와 비슷한 문제를 안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란의 지원을 받되 독자적 이해관계와 의사결정 능력을 갖춘 무장조직이 영토와 미사일·드론을 보유한 채, 이스라엘군을 전장에서 이기지 않고도 경제 동맥을 압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과 사우디 사이에서 벌어진 일에서도 이스라엘이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란과의 장기전으로 미국의 요격미사일 재고는 줄었다. 후티를 상대로 새 전선을 열면 미국은 한발 물러서 있으려는 전장에 항공기·탄약·방어체계를 더 투입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월 중간선거도 앞두고 있다.
미국은 사우디를 돕되 예멘 전쟁에 대한 책임은 피하고 있다. 사우디가 후티를 억제하고 경제적 피해가 관리 가능한 수준에 머무는 한 이 입장은 유지될 수 있다. 다만 원유 수송로와 에너지 가격이 더 심각하게 흔들리면 셈법은 복잡해진다.
바르스키 기자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관계는 사우디와 깊이부터 다르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도 어떤 미국 대통령도 미국의 이익과 비용, 작전 기간, 군의 다른 임무를 따지지 않고 동맹을 위해 무력을 쓰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주 뉴욕에서 걸프 국가 등 역내 정상·대표들과 만나 이란과 역내 전쟁 문제를 논의했다. 카타르는 이란을 포함하는 역내 안보 틀을 추진하고 있고, 사우디는 이란과의 불가침 협정 구상을 내놓았다. 걸프 국가들은 이란으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하면서도 또 다른 충돌 가능성은 줄이려 하고 있다.
바르스키 기자는 이스라엘과 사우디가 같은 지도를 보면서도 서로 다른 것을 본다고 분석했다. 이스라엘은 이란과 대리세력을 최대한 약화시켜야 할 위협으로 본다. 반면 사우디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란이 걸프 건너편에 그대로 남는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사우디가 필요할 때 대리세력과 싸우면서도 이란과의 대화 채널을 유지하는 이유다.
빈살만 왕세자는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이란과 대화하고, 협력 대상을 넓혀 어느 한 나라에 의존하지 않으려 한다. 미국은 무기와 안보를, 중국은 경제 협력과 중재를, 튀르키예와 파키스탄은 군사적 깊이를, 이란과의 채널은 긴장 완화를 맡는 구조다. 이스라엘도 사우디에 필요한 역량을 가진 분야에서 이 목록에 오를 수 있다.
바르스키 기자는 빈살만 왕세자가 여전히 사우디를 지켜줄 나라를 찾고 있으며, 이스라엘이 그 해답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이스라엘은 빈살만 왕세자가 애초에 왜 여러 동맹을 짜 맞춰야 하는 처지가 됐는지 이해하는 데도 그만큼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