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라크발 드론 공격을 받은 동서 송유관을 폐쇄했다. 같은 날 이란의 지원을 받는 예멘 후티 반군은 홍해 남쪽 입구의 전략 요충지인 섬을 장악하면서, 이란과의 전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사우디 에너지부는 전날 드론 공격을 받은 동서 송유관의 가동을 중단했다고 11일 밝히며, 이를 ‘예방 조치’라고 설명했다. 동서 송유관은 사우디 동부에서 생산된 원유를 홍해 연안까지 운반하는 핵심 수송로다.
사우디 외무부는 이 공격이 이라크에서 발사된 다수의 드론에 의한 것이라며 “인명 피해와 물적 손실을 초래했다”고 비난했다. 사우디는 국영 사우디 프레스 에이전시(SPA)를 통해 낸 성명에서, 이라크 정부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기회를 주기 위해” 당장 대응하지는 않겠다고 밝히면서도, 자국의 주권과 안보, 시설,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라크 정부는 이번 공격을 규탄했다. 이라크 총리실은 조사 결과 공격이 이라크 영토에서 발원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관련 군 지휘관을 해임했다고 발표했다. 이라크 소식통 2명은 이라크 정부가 예방 조치 차원에서 이란과의 국경 통행로인 샬람체 통로를 폐쇄했다고 국제 통신사 로이터에 전했으며, 공격 배후를 쫓기 위한 대규모 작전도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사우디와 미국은 지난 7월 이란의 지원을 받는 이라크 내 민병대를 폭격한 바 있다. 당시 후티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던 사우디 석유시설 드론 공격의 배후로 이 민병대를 지목했기 때문이다. 미국 AP통신에 따르면 역내 당국자들은 후티가 이 이라크 민병대의 공격 계획과 실행을 도운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1980년대 건설된 송유관…호르무즈 대체 수송로로 부상
이번에 폐쇄된 동서 송유관은 1980년대 건설됐으며, 이란과의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 통행이 차질을 빚는 상황에서 사우디의 원유 수출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사우디는 6월 초까지 이 송유관의 종착지인 홍해 항구를 통한 원유 수출량을 하루 500만 배럴 이상으로 두 배 넘게 늘린 상태였다.
후티, 홍해 관문 섬 장악…”최근 수년래 최대 영토 확보”
후티 반군은 이날 홍해 남쪽 입구의 세계 주요 해상 항로 중 하나인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따라 최근 수년 사이 가장 큰 영토를 확보했다. 이 확장은 미국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국제 유가와 가스 가격을 끌어올리려는 이란의 전략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예멘 국제 승인 정부 소속 군 고위 관계자와 후티 측 관계자는 각각 후티가 페림섬으로도 불리는 작은 화산섬 마윤섬을 장악했다고 확인했다. 두 사람 모두 언론 발언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익명을 요구했다.
세계 최대 원유 수출국인 사우디는 이란이 선박을 공격해온 호르무즈 해협의 대안으로 홍해 의존도를 점차 높여왔다. 그러나 후티가 폭 28㎞의 바브엘만데브 해협 봉쇄를 시도하면서 이 항로 이용이 더 복잡해졌다.
후티 무장군은 11일 성명에서 마윤섬이나 모카,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채 해안을 따른 진격을 자축했다. 이들은 사우디와의 대치 국면에서 “확전에는 확전으로 맞서겠다”고 공언하면서도, “사우디 선박을 제외한 모든 선사의 항해는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시장은 긴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후티의 행보를 예측하기 매우 어렵다고 평가한다. 이번 주 국제유가는 다시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며 급등했고, 이는 테헤란에 협상력을 더해주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예멘 정부, 사우디의 늑장 대응에 충격
후티는 지난 7월 봉쇄를 선언한 이후 홍해에서 사우디 선박을 공격해왔으며, 사우디 국내 석유 시설도 타격해왔다. 반군 측은 사우디가 수년째 후티 통치 지역을 봉쇄해온 데 대한 대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우디는 후티가 전날 항구 도시 모카를 장악한 데 대응해 이 도시 공항을 타격했다고 후티 측 방송사가 전했다. 피해나 사망자 보고는 없었다.
예멘 국제 승인 정부의 한 군 고위 관계자는 사우디 공군이 모카 함락을 막기 위한 시도조차 하지 않은 데 대해 충격을 받았다고 AP에 밝혔다. 모카는 바브엘만데브 해협에서 약 80㎞ 떨어진 곳이다. 그는 사우디가 미국으로부터 대규모 공중작전에 나설 ‘승인’을 받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 발언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익명을 요구했으며, 예멘 정부군과 여러 동맹 민병대 사이의 “조율 부재”가 후티에 “더없이 좋은 기회”를 안겼다고도 지적했다.
시장조사업체 로이즈리스트인텔리전스에 따르면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통한 선박 통행량은 후티가 2023년 말 팔레스타인 지지를 내세우며 일부 선박을 공격하기 시작한 이후 약 60% 줄었다. 올해 들어 사우디가 호르무즈 해협 대안을 찾으면서 통행량이 늘었지만, 후티의 위협이 재개되며 다시 위축된 상태다.
이 때문에 사우디는 홍해에서 북쪽으로 수에즈운하나 이집트를 관통하는 송유관을 통해 지중해로 원유를 보내는 또 다른 대안까지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는 아시아 고객사들에게는 훨씬 더 긴 수송로다. 후티는 이 항로마저 위협해왔으며, 지난달 말에는 홍해 북쪽에서 사우디 선박을 타격하기도 했다.
이란 “사우디-후티 협상 재개해야”
이란 정부는 이날 자국의 동맹인 후티를 지지하는 차원에서 사우디의 후티 통치 지역 봉쇄를 끝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란 외무부는 사우디와 후티 간 협상 재개도 함께 요구했다.
이란 혁명수비대 대변인은 지난 9일 미국과의 어떤 협상 타결에도 예멘 문제가 포함돼야 한다고 밝혔는데, 이는 예멘 전선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첫 사례로 후티가 테헤란에 갖는 중요성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온다.
사우디는 그동안 “협상 기회”를 계속 제공해왔다고 밝히면서도, 자위권 행사 권리도 있다고 밝혔다. 압바스 아락치 이란 외무장관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사우디와 이란 외무장관이 전날 ‘안정 회복’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예멘 내전 재점화 우려…일주일새 4만6000명 피란
후티가 홍해 연안을 따라 바브엘만데브 해협 쪽으로 진격하면서 사우디 지원을 받는 예멘 정부는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했다. 예멘 국가방위위원회는 전날 회의에서 낸 성명을 통해 자신들이 항행의 자유를 지키는 최전선에 있다며 후티의 대사우디 공격 재개를 규탄했다.
이번 전투 격화는 2022년 이후 예멘 내전을 사실상 멈춰 세웠던 취약한 휴전을 무너뜨릴 위기에 처했다. 이 내전으로 아랍권 최빈국인 예멘의 인구 4000만 명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으며, 지금까지 15만 명이 목숨을 잃고 다수가 기근 직전까지 내몰린 바 있다.
유엔 산하 국제이주기구(IOM)는 지난 한 주 사이 전투 격화로 4만6000명 이상이 피란길에 올랐다고 밝혔다. IOM 예멘 임무단장인 압두사토르 에소예프는 이번 주 피란민 수가 두 배 넘게 늘었으며 앞으로 더 급증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서 공포가 보인다. 다들 겁에 질려 있다”고 말했다.
피란민 중에는 의료진도 포함됐다. 국경없는의사회(MSF)의 예멘 조정관 루 코맥은 대다수 직원이 떠난 모카 병원의 운영 유지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후티는 2014년 예멘 북부와 중부, 수도 사나를 장악하면서 예멘 정부와 전쟁 상태에 돌입했으며, 사우디는 이듬해인 2015년 예멘 정부 편에서 참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