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 길목의 언덕, 라트룬 수도원 뒷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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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룬 트라피스트 수도원 입구 (사진=서예은 / KRM NEWS)

이번에는 순례객들이 자주 찾는 성지 인근에서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길을 소개하려 한다.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을 잇는 1번 도로의 중간쯤, 아얄론 골짜기가 유다 산지로 올라서기 시작하는 길목에 라트룬이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엠마오’로 전승되는 장소 가운데 하나이다. 대표적인 성지로 꼽히지는 않아도, 예루살렘을 오가는 순례객들이 길목에서 한 번씩 들르곤 한다.

라트룬에는 1번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두 개의 수도원 공동체가 자리하고 있다. 도로 북쪽 편의 엠마오 니코폴리스 수도원은 비잔틴 시대 교회 터가 남아 있는 고고학 유적지에 세워져 있으며, 도로 남쪽 편의 라트룬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수도사들이 침묵 서원을 지키며 생활하기에 ‘침묵하는 이들의 수도원’이라고 불린다. 수도원에서 직접 가꾼 포도로 빚은 와인과 올리브유가 유명해 이를 사러 찾는 방문객이 많다.

원래 이번에는 엠마오 니코폴리스 주변의 아얄론-캐나다 공원과 숲길을 걸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이 일대를 휩쓴 대형 산불 이후 공원이 아직 폐쇄되어 있다는 공지를 보고, 발길을 반대편 라트룬 수도원으로 돌렸다.

산불이 지나간 길, 어린 포도나무가 맞아주다

라트룬 수도원 입구에 위치한 포도밭

라트룬 수도원을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1번 도로에서 3번 도로 남쪽 방향으로 들어선 뒤 조금만 달리다 좌회전하면 수도원 입구를 만날 수 있다.

여러 번 찾았던 곳이지만 이번에는 이전과 다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들어서는 길 오른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던 포도밭 자리에, 이제 막 심은 듯한 어린 포도나무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있었다. 지난해 이 일대를 덮친 산불 때문인 듯 했다.

나중에 확인해보고 안 사실이지만, 2025년 봄 라트룬 일대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은 수도원 주변의 포도밭과 올리브밭에도 큰 피해를 남겼다. 당시 수도원 측은 올리브나무 약 1천 그루가 피해를 입었고, 올리브밭의 약 70%가 손상됐다고 밝혔다. 수도사들은 이후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불탄 나무를 다시 심고 피해를 입은 나무를 되살리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수도원 입구 옆 좁은 오솔길

수도원에 차를 세우고 다시 밖으로 나오면, 입구를 정면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으로 난 길이 보인다. 이 길이 바로 이스라엘 내셔널 트레일(Israel National Trail)이다. 이스라엘 북단에서 에일라트까지 이어지는 1,000km 남짓의 장거리 트레일이 이 수도원 곁을 지난다.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앞을 막고 있는 게이트가 하나 나온다. 처음에는 매우 당황했다. ‘설마 내셔널 트레일 길이 막혀 있는 건가?’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게이트 오른쪽으로 사람이 한 명 지나갈 정도의 좁은 오솔길이 나 있고, 바위 위에 이스라엘 내셔널 트레일을 나타내는 흰색·파란색·주황색 세 줄로 된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언덕 위 십자군 요새

함께 동행한 가나안 도그 조이가 십자군 성채를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다. 조이 옆 바위에는 이스라엘 내셔널 트레일 표시가 그려져 있다. (사진=서예은 / KRM NEWS)

좁은 길을 지나 약 10분 정도 오르막을 걸으니 언덕 정상에 오래된 성채의 흔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요새는 12세기 십자군이 지중해 자파와 예루살렘을 잇는 길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을 내려다보는 전략적 위치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요새는 제3차 십자군 전쟁 무렵 살라딘에 의해 허물어진 뒤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

요새에 닿기 직전에는 길이 세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수도원으로 돌아가는 길, 정면은 요새로 오르는 길, 오른쪽은 내셔널 트레일을 따라 남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마음 같아서는 내셔널 트레일을 계속 따라가고 싶었지만, 차를 두고 온 데다 이번 방문의 목적도 장거리 트레킹이 아닌 ‘성지 주변 가볍게 걷기’였기에 요새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요새 주변에는 출입을 막는 줄과 위험을 알리는 표시가 있었다. 안쪽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궁금했지만 들어가지는 않았다. 오래된 성벽과 폐허에는 생각보다 위험한 곳이 많다. 여행지에서 ‘조금만 들어가 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특히 낯선 곳에서는 표시된 안전선을 지키는 것이 좋다.

불탄 숲에서 다시 돋아나는 새잎

사진 뒤편에는 불탄 숲이, 앞쪽에는 불탄 올리브나무에서 새잎들이 돋아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서예은 / KRM NEWS)

대신 요새 주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언덕 정상이라 라트룬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산 곳곳이 갈색이었다. 한때 푸른 숲을 이루었을 나무들이 산불에 타 앙상하게 서 있었다. 이스라엘 곳곳에서 오랜 시간 나무를 심고 숲을 만들어온 이야기들이 떠오르자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걷고 있던 요새 주변 길의 올리브나무들도 검게 그을려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나무 밑동에서부터 새잎이 올라오고 있었다. 뿌리가 살아 있는 한 다시 일어서는 것, 이 땅에 심겨진 올리브나무다운 모습이었다. 저멀리 숲 한켠에 새로 심은 어린 나무들도 보였다.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순례객의 여관에서 수도원으로

1876년에 세워진 옛 마카비 호텔 건물. 자파와 예루살렘 사이를 오가는 순례객들이 머물던 곳이다. (사진=박지형 / KRM NEWS)

요새를 지나면 왼쪽으로 작은 공동체 마을이 나온다. 라트룬 수도원이 땅 한켠에 자리를 내어준 독일 에큐메니컬 공동체 ‘예수형제단’이 지내는 곳이다. 이 마을을 왼쪽에 끼고 돌아 내려가니, 유럽 마을을 연상시키는 오래된 석조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옛 ‘마카비 호텔’ 건물이다. 19세기 후반 야파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마차로 이틀이 걸렸고, 이 호텔은 그 중간에서 순례객들이 하룻밤 묵어가던 곳이었다. 1892년 야파–예루살렘 철도가 개통되면서 손님이 끊겼고, 호텔은 프랑스에서 온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의 손에 넘어갔다. 라트룬 수도원의 역사가 바로 이 건물에서 시작된 셈이다.

다시 수도원 입구로 돌아가는 길

길을 계속 따라가니 3번 도로 앞에서 길이 끊겨 있었다. 지도상으로는 이 길이 3번 도로 건너편까지 이어져 있어 지하 통로라도 있으려니 했는데, 막상 가보니 길은 도로 앞에서 그냥 끝나 있었다. 아마도 3번 도로가 나중에 놓이면서 옛길을 가로질러 끊어버린 듯하다.

원래는 이 길을 따라 3번 도로 바로 맞은편에 있는 기갑부대 기념관 ‘야드 라쉬리온’까지 갈 생각이었다. 1948년 독립전쟁 당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두고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왔던 길로 되돌아갈까 하다가, 3번 도로를 따라 라트룬 수도원 입구 교차로까지 나 있는 좁은 샛길로 빠져나왔다. 하지만 이 길은 권하지 않는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나뭇가지를 헤치며 걸어야 했고, 바닥에는 쓰레기가 널려 있었다.

혹시 라트룬 주변을 직접 걸어보고 싶다면, 무리해서 3번 도로 쪽으로 빠져나가 수도원 입구로 가기보다는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가는 것을 추천한다. 조금 더 걷고 싶다면 내셔널 트레일을 따라 이어지는 길로 살짝 우회하는 방법도 있다. (아래 지도 참조)

짧은 산책이었지만, 이번에 라트룬에서 본 것은 단순한 수도원이나 오래된 성채만은 아니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을 지키기 위해 세운 요새, 오랜 시간 땅을 일구어 온 수도사들, 화재를 견뎌낸 올리브나무, 그리고 이제 막 다시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작은 포도나무까지. 라트룬은 지나간 역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인 동시에, 지금도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코스 정보

  • 출발/도착: 라트룬 수도원 주차장
  • 거리·시간: 왕복 약 2km 안팎, 30분~1시간
  • 난이도: 쉬움
  • 유의사항: 십자군 요새 및 마을 내부 출입금지 / 3번 도로변 샛길은 비추천
라트룬 수도원 하이킹 지도. 필자는 주차장에 차를 주차 후 파란선 길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나 3번 도로를 만나면서 길이 끊겨 있기 때문에 마카비 호텔 또는 십자군 요새에서 왔던 길을 돌아가는 것을 추천한다. 같은 길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경우 지도에서 초록색으로 표시된 길을 따라 좀더 길게 걷는 것도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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