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 지난 6월 체결했다가 며칠 만에 깨진 잠정합의를 다시 살리는 대신, 전쟁을 유리한 조건으로 끝내기 위해 경제적 압박을 강화하는 쪽을 택했다고 복수의 소식통이 27일(현지시간) 타임스오브이스라엘에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란 지도부에 대해 “우리는 그들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 만남을 추진할 생각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과 이란 간에 현재 어떤 대화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면서, 새 제재가 이란과 거래하는 중국 은행들까지 겨냥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같은 날 이란의 외교 수장인 아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은 테헤란에서 무함마드 빈 압둘라흐만 알사니 카타르 총리 겸 외무장관을 접견해 호르무즈 해협 문제를 논의했다. 카타르는 이번 전쟁의 핵심 중재국 중 하나다.
이란과 미국이 물밑에서 새로운 접점을 모색하는 동시에, 정작 백악관은 협상보다 제재를 통한 굴복 유도로 방향을 굳혀가는 모습이다.
미국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이 지난 25일 공개한 새 제재는 이란의 디지털 자산·기술, 금, 항공, 해운 분야를 겨냥하고 있다. 이란산 원유를 운송하는 아랍에미리트·홍콩·중국·싱가포르·유럽 소재 기업들에 대한 2차 제재 가능성도 담겼다.
타임스오브이스라엘과 접촉한 미국 정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 같은 제재로 이란 정권을 굴복시켜, 핵개발 프로그램 억제와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에서 더 유리한 조건을 받아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전했다.
앞서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한 내용의 일부를 확인해준 중재국 고위 외교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6월 잠정합의(양측이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이견으로 체결 며칠 만에 파기한 합의)를 되살리는 데 더는 관심이 없다고 밝혔다. 카타르와 파키스탄이 이 합의를 복원하거나 비슷한 새 합의를 끌어내려 시도해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측에 “이전에도 여러 차례 막판에 뒤통수를 맞았다”며 그런 조건은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했다고 이 외교관은 설명했다.
이 외교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미국이 상당 기간 이란을 계속 압박하며 버텨야 하는데, 미국 내에서 전쟁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만큼 행정부가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이란과 계속 거래하는 러시아를 제재할 것인지 묻는 질문에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지금까지 러시아는 호르무즈 해협과 관련해 꽤 잘 처신해왔다. 그들이 무엇을 하든 우리도 똑같이 대응한다”고 답했다. 중국 은행에 대한 제재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내가 안 하고 있다고 누가 그러던가. 내가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다. 모든 걸 다 발표할 필요는 없지 않나”라고 말해 즉답을 피했다.
전직 모사드 수장이자 미국·이스라엘의 대이란 전쟁을 설계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다비드 바르네아는 이날 예루살렘 시청이 마련한 그의 공로를 기리는 행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새 제재를 환영하면서도 이란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경제·외교·군사 조치를 강화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고 밝혔다.
바르네아 전 국장은 전쟁 전에는 “이란이 이스라엘만의 문제이며, 이스라엘 홀로 나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돌아봤다. 그는 지난 6월 로만 고프만에게 국장직을 넘기기 전까지 5년간 모사드를 이끌었다.
그는 “이제는 전 세계가 이란 문제가 이스라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탄도미사일이든 테러든, 혹은 이란이 대량살상무기를 갖게 될 경우 핵무기든 결국 모두에게 닥칠 것이라는 점을 세계가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큰 신세를 진 트럼프 대통령은 급진적인 이란 정권을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며 “가장 강력한 제재를 부과하기로 한 결정은 옳고 환영할 만하지만, 그 제재는 또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바르네아 전 국장은 “내 판단으로는 이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경제·외교·군사적 조치를 강화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은 없으며, 정권은 결국 무너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란 국민들은 정권의 몰락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들에게는 한 줄기 빛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 통제권을 강하게 쥐고, 선박들에 통과 허가를 요구하며 이를 따르지 않는 선박을 공격해왔다. 반대로 미국이 지난 4월 이란 항구들을 상대로 시작한 역봉쇄는 이란의 연료 수급을 옥죄어 국내 공급 부족을 심화시켰다.
영국 해사무역기구(UKMTO)는 27일 이번 주 호르무즈 해협에서 ‘정체불명의 발사체’가 유조선을 타격해 화재가 발생했으며, 이후 진화됐다고 밝혔다.
아라그치 외무장관과 알사니 총리 겸 외무장관의 이날 회동은 전쟁 이전 세계 상업용 원유 물동량의 약 5분의 1이 통과하던 호르무즈 해협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알사니 총리의 이날 방문은 오만 외교 수장 및 파키스탄 고위 관리들과의 개별 회동을 포함해, 최근 한 주간 이어진 테헤란발 집중 외교전의 연장선에 있다.
알사니 총리는 회담 후 성명에서 이번 회담이 지역 긴장 완화와 안보 강화 방안에 초점을 맞췄다고 밝혔다. 그는 소셜미디어 엑스(X)에 “카타르는 대화와 외교가 위기를 극복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믿는다”고 썼다. 이어 국제법에 따라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항행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 이번 회담에서 강조됐다고 전했다.
카타르 외교부는 알사니 총리와 아라그치 장관이 이란과 오만 사이에서 논의돼 온 호르무즈 해협 관련 틀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고 밝혔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함께 접하고 있는 오만과 몇 주째, 선박 운항을 위한 ‘임시 통로’를 마련하고 전쟁 중 매설됐다고 이란이 주장하는 기뢰를 제거하는 방안을 담은 기본 합의를 논의해왔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지난 26일 양국이 해당 수역에 대한 각자의 몫과 수로 관리로 얻는 수익의 배분 비율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다만 테헤란은 미국이 해상봉쇄를 해제하고, 해외에 동결된 이란 자산을 풀어주며, 원유 제재를 철회하지 않는 한 해협을 재개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란은 해협을 이용하는 선박에 통행료를 부과하려는 방안도 추진해왔는데, 이는 미국과 주변국들이 강하게 반대하는 사안이다.
이란 모하마드 자파르 가엠파나 부통령은 26일 미국의 봉쇄로 국내 생산 부족분을 메울 휘발유 수입이 막혀 있다고 밝혔다. 그는 관영 IRNA 통신에 “휘발유 생산량이 부족한데, 미국의 해상봉쇄 때문에 수입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 며칠간 이란 곳곳에서는 주유소 앞에 길게 줄을 선 시민들의 모습이 목격됐다. 모센 하지미르자이 대통령비서실장은 자세한 설명 없이 휘발유 배급량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세계적인 산유국으로 그동안 세계에서 가장 값싼 축에 드는 휘발유 가격을 유지해온 이란은 수년간 휘발유에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해왔으며, 가격 정책 변경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으로 꼽힌다.
미국이 이란 경제를 옥죄어가는 가운데, 이란 관리들은 이 같은 조치를 두고 테헤란의 노선을 바꾸지 못할 “실패한 정책”이라고 일축했다. 이란 수석 협상대표인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는 현지 매체를 통해 낸 성명에서 “우리나라는 전면적인 경제전쟁을 치르고 있다”며 “정부가 이 전선에서도 적을 물리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란 경제는 이번 전쟁 이전부터도 수십 년간 이어진 국제 제재로 타격을 입어왔으며, 만성적인 인플레이션과 통화 가치 하락에 오랫동안 시달려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