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정부가 8일 이스라엘 서안지구 정착촌에서 생산된 상품의 수입을 금지하는 등 광범위한 경제 제재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미국 뉴욕타임스가 이 사안에 정통한 당국자 7명을 인용해 7일 보도했다. 정착촌 건설을 돕는 기업에 대한 제재도 포함될 수 있다고 이 가운데 3명이 전했다.
이번 조치가 현실화하면 영국이 개별 정착민과 극우 성향 이스라엘 장관 등 개인을 겨냥해온 기존 제재에서 벗어나, 정착촌 관련 경제 활동 전반으로 압박 수위를 크게 높이는 셈이 된다. 2024년까지 영국 중동담당 장관을 지내 이번 정책에 정통한 타리크 아흐마드 경은 뉴욕타임스에 “개인에서 시스템과 프로세스로 제재 범위를 넓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착촌 생산품이 연간 약 80억달러 규모인 영국-이스라엘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 실제 경제적 타격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다만 다른 유럽 국가들의 추가 제재를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파급력은 상당할 것이라는 분석도 함께 나왔다.
영국 매체 가디언은 소식통을 인용하지 않은 채, 에드 밀리밴드 영국 외무장관이 영국 의회 연설에서 정착촌 생산품과 일부 서비스에 대한 제재를 발표하는 동시에 두 국가 해법(이스라엘·팔레스타인 병존)을 지지하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관련 조치를 비판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밀리밴드 장관이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겪는 인도적 피해를 이전 장관들보다 강한 어조로 지적할 것이라고 이 매체는 덧붙였다.
이번 발표를 계기로 안 그래도 경색된 런던과 예루살렘 간 관계가 더욱 냉각될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이미 보복 조치를 시사한 상태다.
앞서 영국의 제재 대상에 올랐던 베잘렐 스모트리흐 이스라엘 재무장관과 이타마르 벤그비르 이스라엘 국가안보장관은 이번 보도에 격앙된 반응을 보이며 강경 대응을 촉구했다. 스모트리흐 장관은 소셜미디어 엑스(X)에 주이스라엘 영국대사 추방을 요구하며 “우리는 급진 이슬람이 점령한 나라, 스스로의 경제·사회적 붕괴를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공격해 모면하려는 반유대주의 정부의 발판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이스라엘 내 영국의 위임통치는 끝났다”고 덧붙였다.
벤그비르 장관은 스페인어로 엑스에 글을 올려 이스라엘이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제도(아르헨티나명 말비나스) 영유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향해 “아르헨티나의 말비나스제도 영유권을 인정하고, 점령이 계속되는 한 영국에 제재를 가하라”고 촉구했다. 벤그비르 장관은 영국이 “섬을 폭력적으로 빼앗고 아르헨티나 국민의 재산을 훔쳤다”고 비난했으며,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이 게시물을 자신의 계정에 공유했다.
이번 제재는 밀리밴드 장관이 지난주 이스라엘과의 “포괄적 관계 재설정”을 언급하며 정착촌 확장에 대응하는 조치를 준비 중이라고 밝히는 등 영국의 대이스라엘 정책이 전반적으로 강경해지는 흐름 속에서 나왔다. 밀리밴드 장관은 가자지구 상황에 대해서도 이스라엘을 강하게 비판해 왔다. 그가 가자지구로 반입되는 의약품이 차단되고 있다는 정황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자, 이스라엘 외무부와 마이크 허커비 주이스라엘 미국대사는 주말 사이 거세게 반발했다. 허커비 대사는 영국 정부를 향해 “유대인 혐오”라고 비판했으며,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로의 의약품 반입을 막고 있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이번 무역 제재는 영국이 예루살렘 동쪽 서안지구의 E1 정착촌 사업에 대한 반대 수위를 높여온 가운데 나왔다. 이 사업은 유대인 정착촌을 넓혀 예루살렘과 인근 마알레아두밈 지역을 연결하는 계획으로, 밀리밴드 장관은 이를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지난달 이 지역에 주택 1234채 규모의 주거단지 7곳에 대한 입찰을 시작했으며, 앞서 2025년 8월에는 약 3400채 규모의 주택 건설을 승인했다.
E1 사업이 완성되면 팔레스타인의 주요 거점인 베들레헴과 동예루살렘, 라말라 사이의 영토적 연속성이 사실상 끊겨 향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수립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이 때문에 이 사업은 과거 미국 정부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거센 반대로 수년간 동결됐다가 최근 재추진됐다. E1 사업을 강하게 지지해온 스모트리흐 장관은 이 사업이 “팔레스타인 국가 구상을 매장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기드온 사르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지난주 영국이 정착촌에 대한 징벌적 조치를 강행할 경우 이스라엘도 보복하겠다고 경고하며, 예루살렘 측에 “동원할 수단들”이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대응 조치의 하나로 미국 주도로 가자지구 남부 키르얏가트에 설치된 국제가자지원센터에서 영국 측 인력을 배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사안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타임스오브이스라엘에 예루살렘 측이 이 조치와 함께 런던을 겨냥한 “다른 조치들”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영국 측은 자국 인력 배제가 가자지구 상황 개선 노력을 “저해”할 것이라며, 자국 인력이 미국의 요청으로 파견돼 이스라엘 및 국제사회 파트너들과 함께 미국 주도 전후 체제 이행 작업을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한편 영국 내 유대인 단체들은 이번 정착촌 제재 방안이 이스라엘만 부당하게 겨냥하며 반유대주의를 부추길 수 있다고 정부에 반대 로비를 벌여온 것으로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 내 팔레스타인 단체들은 구체적 내용이 공개되기 전까지 판단을 유보하면서도, 데이비드 래미 전 외무장관이 2024년 9월 대다수 대이스라엘 무기 수출 허가를 철회한 이후 가장 큰 폭의 정책 변화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유엔 팔레스타인 인권 특별보고관인 프란체스카 알바네세는 가디언에 정착촌 생산품 금지가 “매우 중요한” 변화이긴 하지만, 진정한 ‘패러다임 전환’이라 부르려면 훨씬 더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농산물과 화장품 등에 대한 제한만으로는 효과가 제한적이라며, 정착촌 특히 E1 사업에 자금을 대거나 보험을 제공하거나 건설에 관여하는 기업들에 대한 제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는 알바네세 특별보고관 개인의 제언일 뿐, 영국 정부가 이번에 확정한 조치는 아니라고 가디언은 전했다.
국제사회 대다수는 서안지구 내 이스라엘 정착촌을 국제법상 불법으로 간주하며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의 걸림돌로 보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 지역과의 역사적 연고와 안보상의 이유를 들어 이 같은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