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란고원 드루즈, 잇단 비극에 시리아 등지고 이스라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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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즈달샴스는 이스라엘 북부지구에 속한 드루즈 지방자치단체로, 골란고원 북쪽 헤르몬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커먼즈)

이스라엘 골란고원에 사는 드루즈 주민들이 수십 년간 이어온 시리아 정체성을 버리고 이스라엘 쪽으로 빠르게 기울고 있다고 이스라엘 매체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이 14일 보도했다. 2024년 헤즈볼라의 로켓 공격으로 드루즈 어린이 12명이 숨지고, 이듬해에는 시리아군에 의한 드루즈 대량 학살까지 벌어지면서 나타난 변화라고 매체는 전했다.

골란고원의 마즈달샴스, 마사데, 에인키니예, 부카타 등 드루즈 마을 4곳에는 주민 약 2만9천명이 살고 있다. 이스라엘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으로 이 고원을 점령했고, 1981년에는 사실상 병합했다. 그러나 드루즈 주민 대다수는 그동안 시리아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며 이스라엘 사회 편입을 거부해왔다.

마즈달샴스 큰길가에서 터키식 커피를 대접하며 취재진을 맞은 카셈 사바그(50)는 최근 몇 년 사이 드루즈 사회의 심리적 지형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했다. 조류보호 관련 일을 하는 사바그는 “우리가 자랄 때는 스스로를 시리아인이라고 말하도록 배웠다”며 “드루즈 사회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했다.

시민권 신청, 2025년부터 폭발적 증가

이런 변화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지표는 이스라엘 시민권 신청 건수다. 이스라엘은 1981년부터 골란 드루즈에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해왔지만, 대다수 주민은 지난 30여년간 시민권 대신 영주권을 선택해왔다. 영주권으로도 의료·교육·법적 지위는 모두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권 신청은 2021년부터 조금씩 늘기 시작해 2022~2024년에는 연간 500~600건 수준이었다. 그러다 2025년 한 해에만 신청 건수가 3,750건으로 폭증했다. 이스라엘 내무부 자료에 따르면 2026년 3월 기준 4개 드루즈 마을 주민의 약 40%가 이스라엘 국적을 취득한 상태다.

‘함께 서로를 보증하다'(히브리어로 비아하드 아레빔 제 라제) 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는 드루즈 출신 로레나 키젤 카티브(29)는 이런 변화를 이끈 두 사건에 대해 “골란 드루즈에게 매우 근본적인 전환이었다”고 설명했다. 카티브는 요세프 하다드의 뒤를 이어 이 단체를 이끌고 있다.

국경으로 갈라진 가족, 그래도 시리아를 조국으로 여기던 시절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은 원래 하나였던 가족들을 국경과 유엔 완충지대로 갈라놓았다. 이스라엘 쪽에 남게 된 드루즈들은 국경 너머 가족에 대한 보복을 우려해, 그리고 언젠가 골란이 시리아에 반환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시리아에 대한 충성을 이어갔다.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여전히 교전 상태였음에도 드루즈 학생들은 2011년 시리아 내전이 터지기 전까지 다마스쿠스로 유학을 갔고, 이스라엘 쪽 드루즈 여성이 시리아 마을로 시집가는 국경 간 혼인도 이뤄졌다. 골란고원의 명물인 사과 등 농산물도 특별 협정을 통해 시리아 시장으로 팔려나갔다.

하지만 국경 양쪽 가족 간의 유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예전과 달리 재결합의 의미는 더 이상 ‘시리아로의 복귀’가 아니다. 드루즈 주민들은 아흐마드 알샤라 현 시리아 대통령의 이슬람주의 정권을 경계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점차 이스라엘을 자신들의 ‘보호자’로 인식하고 있다.

축구장 로켓 참사와 스웨이다 학살, 결정적 전환점 되다

카티브는 1971년부터 2000년 사망할 때까지 시리아를 통치한 하페즈 아사드 시절을 언급하며 “아사드 시니어 통치 시절에는 시리아가 조국이라는 인식이 뚜렷했고, 시리아에 대한 충성이 정체성의 핵심 요소였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축구장의 비극이 첫 번째 감정적·인지적 전환점이었다”며 “골란 주민의 안전은 국경 너머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바로 이곳 이스라엘에서 우선적으로 지켜진다는 인식을 심어줬다”고 설명했다.

2024년 7월 27일 저녁, 이란의 지원을 받는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가 쏜 이란산 팔라크-1 로켓이 마즈달샴스의 축구장에 떨어져 드루즈 어린이 12명이 숨졌다. 헤즈볼라는 당시 시리아를 통치하던 바샤르 알아사드 전 대통령의 가까운 동맹 세력이었다.

이스라엘 응급구조대 마겐 다비드 아돔 소속 구급대원인 아드함 사파디(50)는 이 공격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딸 베네스(11)가 마음을 바꿔 축구장에 가지 않았기를 기도하며 현장에 뛰어들었지만, 축구장 안쪽에서 딸이 친구인 알마 파케르 엘딘(12), 이셀 나샤아트 아유브(12)와 함께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파디는 담요를 요청해 세 소녀를 덮어준 뒤 다른 부상자들을 치료했고, 8분 뒤 이스라엘군(IDF) 병력이 도착하자 그제야 딸 곁으로 돌아갔다.

사파디는 “이 비극이 있기 전 우리 가족은 정말 행복했다”며 “이제는 결혼식에 가도 축하 인사만 건네고 자리를 뜬다. 아내는 마음이 무너진 어머니가 됐고, 이곳에는 12개의 상심한 가정이 있다. 마즈달샴스 전체가 이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 마을 전체가 애도 중이고, 사람들은 무너져 있다”고 말했다. 당시 대피소는 사고 지점 인근에 있었지만 아이들이 대피에 필요한 6초를 확보하지 못해 참변을 피하지 못했다고 사파디는 전했다. 사고 이후 대피소는 인접 놀이터로 옮겨졌고, 축구장에는 나무와 꽃, 추모비가 새로 조성됐다. 유족들은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교육·체육 지원 자선단체를 세워 지금까지 장학금 100개를 지급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25년 7월, 시리아 남부 스웨이다주에서 드루즈 주민과 베두인 부족 간 인질 납치가 잇따르며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알샤라 대통령은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병력을 투입했지만, 실제로는 베두인 편에 서서 대규모 살상을 자행했다. 현지 주민들은 이 사건을 ‘드루즈판 10월 7일’이라 부른다. 시리아인권관측소(SOHR)에 따르면 이 유혈사태로 민간인 789명을 포함해 2천명 이상이 며칠 사이 목숨을 잃었다. 시리아 정부가 구성한 위원회는 자체적으로 1,760명의 사망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당시 유출된 영상에는 군복을 입은 무장괴한들이 비무장 민간인에게 신원을 캐묻는 장면이 담겼다. 남성이 “시리아인”이라고 답하자 무장괴한들은 “시리아인이 무슨 뜻이냐, 수니파냐 드루즈냐”고 되물었고, 남성이 드루즈라고 답하자 그 자리에서 총격을 가해 살해했다.

이 학살에 이스라엘 내 드루즈 사회는 격렬히 반발했고, 지도자들은 정부에 시리아의 동포를 보호하기 위해 개입할 것을 촉구했다. 이스라엘은 학살을 자행한 세력의 철수를 압박한다는 명분으로 시리아 남부와 다마스쿠스에 공습을 가했다. 갈릴리 지역의 한 드루즈 마을에는 의약품과 식량, 물자를 시리아로 보내기 위한 ‘전쟁상황실’이 꾸려지기도 했다.

스웨이다의 유혈사태는 앞서 시리아 해안 지역에서 벌어진 종파 폭력의 연장선이라는 시각도 있다. 신정권과 아사드 충성파 간 충돌이 아사드 전 대통령이 속한 소수종파 알라위파를 겨냥한 보복 살해로 번진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스웨이다 사태 이후 알샤라 대통령은 가해자 처벌과 소수자 보호를 재차 약속했고, 지난달 미국은 시리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하며 알샤라 정권에 대한 신뢰를 표시했다.

하지만 사파디는 알샤라 대통령의 이런 약속에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그는 알샤라를 “양복 입은 늑대”라고 부르며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그가 양복을 벗기 전에 먼저 쫓겨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카티브는 스웨이다의 유혈사태를 “드루즈 사회의 인식 전환을 이끈 가장 결정적인 계기”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제 질문은 더 이상 ‘우리가 누구에게 충성하는가’가 아니라 ‘위험에 처했을 때 누가 진짜로 우리를 지켜주는가’로 바뀌었다”며 “시리아와의 역사적 연결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미래가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반역처럼 여겨지던 시민권 신청, 이제는 다르다”

스웨이다 학살 이후 사바그는 “우리 안에서 희망이 죽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모두 매우 실망했다. 나는 자국민조차 존중하지 않는 나라에 속할 수 없다. 여기 이스라엘에서는 내 가족이 존중받는다. 이곳이 내가 있고 싶은 곳”이라고 밝혔다. 지난달에는 시리아 드루즈 지도자 히크마트 알히즈리가 재차 시리아로부터의 분리와 이스라엘과의 ‘연합’ 구성을 촉구하며, 이스라엘이 또 다른 학살로부터 드루즈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카티브는 “이스라엘 시민권을 신청하는 것은 한때 거의 반역 행위로 여겨졌다”며 “그러나 오늘날에는 강한 드루즈 정체성과 뿌리에 대한 연결을 유지하면서도, 안보와 미래, 권리, 그리고 자신이 사는 곳에 대한 소속감을 위해 이스라엘 시민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바그 부부는 아직 시민권을 신청하지 않아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 선거에는 투표할 수 없지만, 지역 정치에는 적극적이다. 그는 “크네세트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면서도 “지방선거에서는 투표할 것이다. 지역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은 직접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을학기 하이파 테크니온 이스라엘공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할 예정인 부트사마(20)는 젊은 세대의 상황이 여전히 “극도로 복잡하다”고 말했다. 성만 밝히기를 거부한 그는 “우리는 항상 정체성 위기를 겪어왔다. 이곳에도 가족이 있고, 시리아에도 가족이 있다. 이곳 거의 모든 가정이 국경 양쪽에 친척을 두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축구장 참사와 스웨이다 학살이 “사람들의 감정과 이념”을 바꿔놓았다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청한 현지 피자가게 직원은 이스라엘의 높은 생활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가 좋다. 국경이 열려도 나는 여기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여기서는 존중해주고, 간섭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파디는 젊은 세대가 이스라엘에 머물기만 하는 게 아니라 군에도 적극 자원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1967년 이전 태생 세대는 시리아와의 가족적 유대 때문에 이스라엘 시민권 신청을 꺼렸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더 많은 젊은이가 이스라엘군과 경찰에 자원하고 있다”며 두 직역 모두 시민권이 필요한 자리라고 설명했다. 지난 3월에는 공병대 소속 마헤르 카타르 상사(38)가 헤즈볼라 공격으로 전사했다. 카타르는 남부 레바논 츠비오니 전초기지 인근에서 고립된 전차를 구조하기 위해 D9 불도저를 몰고 나갔다가 오르 뎀리 상사와 함께 헤즈볼라의 박격포 또는 미사일 공격에 목숨을 잃었다. 이 전초기지는 2024년 11월 헤즈볼라와의 휴전 협정 체결 이후 이스라엘군이 남부 레바논에 세운 5개 전초기지 중 하나다. 카타르의 장례식은 마즈달샴스에서 열린 최초의 군장(軍葬)이었다.

드루즈는 11세기 시아파 이슬람에서 갈라져 나온 신비주의 종파로, 전 세계에 약 100만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대다수는 시리아, 레바논, 튀르키예, 요르단, 이스라엘에 흩어져 산다. 이 가운데 갈릴리 지역에 사는 약 15만명의 드루즈는 골란 드루즈와 달리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에 충성을 다짐하며 병역에도 참여해왔다. 드루즈교는 아브라함과 모세, 예수, 무함마드를 모두 예언자로 여기지만 교리 상당 부분을 비밀에 부치며, 개종을 받아들이지 않고 독자적인 국가 건설을 추구하지 않는 대신 거주하는 나라에 충성하는 전통을 지켜왔다.

“평화가 오면 정체성도 자유로워질 것”

지난 6월 알샤라 대통령은 한 인터뷰에서 자국이 이스라엘과 안보협정 체결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것이 궁극적으로 양국 간 포괄적 평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별도로 이스라엘과 레바논은 지난 6월 26일 미국 중재로 이스라엘군의 제한적 철수를 골자로 한 평화협정 기본틀에 서명했다.

카티브는 “평화가 이뤄진다면 사람들은 두려움이나 압박 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할 자유를 더 크게 느낄 것”이라며 “시리아에 대한 뿌리와 가족, 역사적 연결을 존중하는 드루즈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에 소속감을 느끼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사파디는 여전히 국경이 열리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레바논, 시리아 사람들을 직접 보고 아랍인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며 “내 꿈은 국경이 열려 시리아와 레바논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실제 삶이 어떤지 직접 보는 것이다. 우리는 열린 국경을 원하지만, 테러와 전쟁 없는 국경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촛불이 켜진 추모비 앞에 선 그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할 말이 없다”며 “평화라는 말 외에는”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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